그랜드 투어러(GT)라는 장르는 매혹적이다. 장거리를 빠르면서 편하게 달릴 수 있는 자동차. 한 줄 설명만으로 자동차가 줄 수 있는 다양한 가치를 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일단 이동수단으로서 기본적으로 편안함을 보장한다. 그러면서 자동차를 로망의 대상이 되게 하는 고성능 또한 겸비했다. 게다가 정통 그랜드 투어러라면 모름지기 실루엣이 우아하다. 길고 넓은 차체가 낮게 웅크린 형태로, 유려한 지붕 선을 뽐낸다. 그랜드 투어러 자체가 럭셔리 영역에서 활동하기에 고급스런 안팎도 빼놓을 수 없다. 보는 즐거움도 크다는 뜻이다. 모두 자동차를 단순한 이동수단에서 럭셔리 오브제로 바라보게 하는 요소들이다. 이러니 매혹적일 수밖에.
아우디에서 그랜드 투어러라는 장르에 가장 부합하는 모델은 RS 7 스포트백(이하 RS 7)이다. 4도어 쿠페에 짐 공간도 넉넉한 A7을 기본으로, 고성능 엔진까지 더했으니까. A7의 디자인이야 아우디 디자인의 정수를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랜드 투어러를 증명하는 자격증처럼 눈을 즐겁게 하는 실루엣도 선명하다. 거기에 RS 모델만의 몇몇 디자인 요소는 고성능 모델만의 인장으로 기능한다. 과시하는 장식이 아닌, 계급장처럼 작지만 분명한 징표. 고성능 자동차다운 긴장감과 럭셔리 세단다운 고급스러움이 공존하는 실내도 빼놓을 수 없다. 면면이 그랜드 투어러에 부합한다. RS7의 잔상이 머릿속에 남는 이유다.
자동차를 즐기는 방법은 명확하다. 타봐야 한다. 단지 보기만 하면 불완전연소처럼 아쉬움이 남는다. 보고 타고 느껴야 한다.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 모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RS 7의 잔상이 자꾸 어른거려 다시 만날 기회를 마련했다. 보고 타고 느끼는 과정을 더 길고 진하게 유지하기 위해 멀리 떠나기로 했다. 이왕이면 달릴 길이 끝나는 바다까지. 사실 모든 자동차가 시승할 때 단거리보다 장거리에서 속내를 더 잘 보여준다. 긴 시간 접하기에 미처 못 본 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모든 자동차가 그렇지만, 그란 투리스모라면 더욱 장거리를 달려야 한다. 장거리 선수에게 50m 스퍼트 테스트만 하면 제대로 알 리 없으니까.
RS 7은 다시 봐도 눈매가 매력적이다. 짧은 선을 나열해 면을 만들었다. 각 선은 독립적으로 빛을 발하기에 평범한 면도 아니다. 눈매 중간에 선의 길이를 달리 해 면에 변화도 줬다. 같은 눈매라도 눈동자의 크기와 색, 형태에 따라 감흥이 달라지잖나. 아우디는 LED를 통해 다채로운 눈매를 그려냈다. 새삼 깨닫는다. 매번 탁월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니 좀 익숙해졌나보다. 그동안 좋은 걸 자주 봐서 무뎌졌달까. 집중하고 다시 보니 탐스러운 눈매가 눈에 박힌다. 차를 타기 전에 뿌듯한 마음이 차오른다. 자기 소유라면 그 감흥이 더욱 진할 테다.
RS 7의 시트도 꼭 거론해야 한다. RS 7의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다. 시트에 앉으면 부드러우면서도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벌집 패턴으로 멋을 낸 RS 스포츠 시트다. 고급스런 질감의 발코나 가죽이 촉각을, 붉은색 스티치가 시각을 자극한다. 기본적으로 편하면서도 버킷 시트 형태라 허리를 잘 잡아준다. 마음먹고 달릴 때도 스포츠 시트의 기능을 확실히 수행하는 셈이다. 시트에 앉아 스티어링 휠을 잡으면 시트에서 받은 감흥이 이어진다. 알칸타라의 촉감이 손에 착, 붙는다. 시야에 걸리는 A필러 역시 알칸타라로 감싸놓았다. 다시 촉각과 시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그러니까 시트에 앉아 스티어링 휠을 잡고 앞을 바라보는 일련의 과정에서 RS 7의 풍요로운 질감을 만끽할 수 있다. 단지 앉았을 뿐인데도.
또 다른 풍요로움은 가속페달을 밟으면 바로 전해진다. 4.0 V8 트윈 터보 엔진의 포효. 가속페달을 밟는 정도에 따라 음색을 달리 한다. 날카롭게 귀를 꿰뚫기보다 은은하게 몸을 울린다. 그랜드 투어러의 성격에는 후자가 더 맛깔스럽다. 그렇다고 날카로운 면을 못 즐길 리 없다. 최고출력 600마력이 어디 가나. 작심하고 끝까지 밟으면 금세 전방에 소실점을 형성한다. RS 7의 풍요로움은 날카로운 스포츠성만이 아니란 얘기다. 세대가 바뀌면서 RS 라인업은 품이 넓어졌다. 밀어붙일 땐 도로를 접어 달리는 듯하면서도, 긴장 풀고 달릴 때 더없이 편안하다. 장거리를 내내 밀어붙이며 달릴 순 없잖나. 그랜드 투어러라면 음미할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다. RS 7은 둘 사이를 오가며 장거리 여정을 즐기게 한다.
바다가 보고플 땐 종종 양양에 온다. 목적지의 풍광도 좋고, (평일이라면) 가는 길도 시원하다. 그랜드 투어러로서 RS 7을 즐기기에 알맞은 코스다. 고속도로에선 성능을 만끽하기에 좋고, 양양에 들어서면 운치 있는 해안도로가 기다리니까. 심장박동수를 높여 달리다가 뜨거워진 심장을 유유자적 달리며 식히기에 알맞다. 그 구간마다 RS 7은 때로 격하게, 때로 진중하게 달리며 이동의 즐거움을 극대화한다. 이때 여정의 BGM을 책임지는 뱅앤올룹슨 오디오 시스템도 빼놓을 수 없다. 섬세하면서도 풍성한 소리는 언제나 실내 질감을 더욱 고급스럽게 하는 결정적 요소다. 오디오 시스템 역시 그랜드 투어러다운 풍요로움에 일조한다.
RS 7이 그랜드 투어러로 손색없는 이유는 여정 내내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방점을 찍은 순간이 따로 있다. 여정을 끝내고 차에서 내릴 때. 몸이 바로 알아챈다. 장거리 운전은 피곤하다. 하지만 모든 차가 똑같은 피로도를 유발하지 않는다. 장거리를 달려도 덜 피곤한 자동차가 있다. 편안함만 따지면 대형 세단이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을 게다.
RS 7은 어디쯤에 위치할까? 편안함 쪽에 상당부분 치우쳐 있다. 긴 휠베이스와 커다란 차체가 피로를 유발하는 자잘한 요소를 삼키는 까닭이다. 그러면서 짜릿함의 영역에도 지분을 많이 보유한다. 짜릿함이 꼭 피로도로 이어지진 않는다. 시종일관 지루하게 하는 편안함보다 중간중간 짜릿할 수 있는 편안함이 덜 피로하게 한다. 적절한 재미는 뭐든 능률을 높이잖나. RS 7의 고성능은 그런 역할을 해낸다. 오래 달려도 의외로 피로도가 적다는 점. 장거리를 빨리 편안하게 달리는 그랜드 투어러로서 이보다 더 명확한 이유가 있을까. 능력만 된다면 RS 7을 마지막 자동차로 품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김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