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지금까지 없던 결이 다른 고성능, 아우디 RS e-트론 GT
다시 봐도 매끈하다. 어느새 세 번째다. 첫 출시 발표 때 한 번, 짐카나로 짧게 만났을 때 또 한 번. 볼 때마다 차체에 흐르는 선이 다르게 다가온다. 고정되지 않고 흐른달까. 분명 정지 화면인데 동영상 속 차를 보는 기분이다. 음각된 보닛에서 흐른 선이 날렵하게 차체를 낮춘다.헤드램프 양쪽 모서리에서 시작된 선도 유연하게 뒤로 흐른다. 핵심은 뒤태다. 위아래로 차체를 감싸는 선이 각각 뒤를 휘감는다. 뒤에서 끝나는 느낌이 아닌, 다시 앞으로 순환하는 느낌. 그 사이사이 아우디의 징표 같은 램프류 디자인이 유려한 선을 강조한다.
앞모습은 무게중심을 낮추고, 뒤태는 풍성해졌다. 누가 봐도 아우디지만, 여느 아우디와 다르다. 분명한 전환점. RS e-트론 GT은 ‘디자인의 아우디’로서 펼칠 다음 장을 연다. 아우디의 첫 고성능 전기차라는 의미 이상으로 볼거리가 많다. 세 번째 역시 감상의 영역으로 시작했다.오래도록 감상할 수 있는 호사라니. 이런 기분을 느끼며 차문을 열었다. 이제 감상을 넘어 오감으로 느낄 때다. 오래 달려보기로 한다. 멀리 달려보기로 한다. RS e-트론 GT는 이름처럼 그랜드 투어러를 지향한다. 형태라기보다 성격을 지칭하는 장르다. 원래 제대로 성격을 알려면, 사람이든 자동차든 같이 여행을 떠나봐야 한다. 제대로 알아볼 시간이다.
시동 버튼을 누르자 RS e-트론 GT가 고요하게 깨어난다. 이젠 전기차가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고요한 시동은 낯설다. 더구나 고성능 모델이니까. 세상의 변화가 시동에서부터 느껴진다. 가볍게 가속페달을 밟으며 출발. 한적한 골목길을 조용하게 가로지른다. 646마력을 발휘하는 고성능 자동차의 출발이 정숙하다니. 게다가 부드럽다. 시내의 교통량 사이에서 긴장하지 않게 한다. 몸놀림은 차분하고 진득하다. 장소 불문, 고성능을 매순간 증명하며 흩뿌리는 내연기관 자동차와는 다르다. 가다 서다 반복하는 와중에도 침착하고 편안하다.그랜드 투어러로서 아직 빠르게 장거리를 달리진 않았다. 그에 앞서 한 가지는 확실하다. 편안하게 달릴 거라고 바로 직감했다. 기본 주행모드인 컴포트에선 여느 세단 뺨치게 나긋나긋하다. 이 정도면 마트에 장보러 오가도 문제없다. 일상성을 확보한 고성능 모델로서 첫인상을 정립한다. 전기차다운 정숙한 실내도 한몫한다. 조용한데 부드러우니 운전이 꽤 산뜻하다.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이제 속도를 내볼 때다. 주행모드를 스포츠로 바꾼다. 컴포트 모드에서도 가속페달을 깊게 밟으면 순식간에 출력을 토해냈다. 컴포트 모드도 충분히 극적이다. 그럼에도 스포츠 모드만의 차별점이 확실하다. 무엇보다 하체가 더 민첩하게 반응한다. 고속에서 잔동작을 한층 말끔하게 잡아낸다.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차체 안정감을 높이는 변화다. 그렇다고 긴장하게 할 정도로 가혹하게 단단해지진 않는다. 탄성의 밀도가 높아진달까. 여전히 부드러움을 유지한 채 자세를 더 깔끔하게 다잡는다. 내연기관 RS 배지 라인업이 새로 추구하는 방향성과 일치한다. 전기 파워트레인 품은 RS는 그 지점이 더 드러난다.
언제나 느끼지만, 에어 서스펜션의 다재다능함은 감탄할 만하다. 노면과 시트 사이에 두터운 층을 형성해 만전을 기한다. 충격을 진중하게 걸러내고, 자세를 민첩하게 다잡는다. 전자식 콰트로 역시 차분하게 출력을 노면에 전달한다. 가속페달을 밟을 때마다 각 요소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운전자는 단지 즐길 뿐이다. 고속의 영역을 더없이 편하고 손쉽게.내연기관 고성능 모델과 다른 점이 확연하다. 쭉 뻗은 길에서 출력을 마음껏 음미하다 보니 깨달았다. 피로도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이렇게 고속으로 달리면서 한없이 편안할 줄이야. 긴장이 아드레날린을 뿜게 하는 건 맞다. 대신 긴장할수록 쉬이 피곤해진다. 고속에 걸맞은 포효가 몸을 자극하는 만큼 지치기도 쉽다. RS e-트론 GT는 포효 대신 e-사운드로 실내를 채운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없으니 피로도 역시 줄어든다.
그렇다고 심심한가 하면, 아니다. 우주비행이 연상되지만 마냥 과장된 소리만은 아니다. 엔진 사운드를 조합해 이질감을 줄였다. 그러면서 가속페달 반응에 따라 소리가 변화한다. 깊게 밟으면 거세진다. 발을 떼면 그에 따라 음색이 달라진다. 낯설지만 분명히 자동차를 조작한다는 신호는 확실히 전한다. 정교하게 소리를 조율해 적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세심함이 운전하는 즐거움을 배가한다. 운전하는 즐거움이야 고성능이 줄 수 있는 대전제 아닌가. 선명하게 전해진다.
또 다른 차이도 있다. 고속 주행 평균 속도가 높아진다. 다른 어떤 고성능 모델을 시승할 때보다 평균 속도가 높다. 정숙한 채로 손쉽게 고속 영역에 진입해서다. 일부러 속도를 내보려고 작심하지도 않았다. 그냥 달리다 보니 어느새 고속이다. 피로도는 낮은데 출력이 더없이 강력하니까. 웅웅, 울리며 실내를 간질이는 e-사운드가 흥을 돋우니까. 무심코 달리다가 속도계 숫자에 깜짝 놀라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기 일쑤다. 조용히 시침 뚝 떼고 고속 영역을 손쉽게 오가니 속도감에 무뎌진다. 그런 점에서 어느 그랜드 투어러보다 편하면서 빠르다. 고성능 전기차가 선사하는 독특한 감각이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를 즐기기로 한다. 오래된 지방도를 훑어나간다. 굽잇길이 국도변 표지판처럼 수없이 나타난다. 84.7kg·m라는 가공할 토크가 돋보이는 시간이다. 가속과 감속, 방향 전환이 넘실거리는 토크에 맞춰 리듬을 탄다. 느긋한 라운지 뮤직은 아니다. 열정적인 탱고 리듬에 가깝다. 속도는 빠르고, 동작은 절도 있다. 반복되는 굽잇길을 무대 위 정확한 몸놀림처럼 휘젓는다. 그 사이, 거친 호흡 한 번 내뱉지 않는다. 그랜드 투어러뿐 아니라 스프린터로서도 월등하다. 짐카나 시승으로도 느낀 바지만, 새삼 확인했다.
‘하, 이것 참….’ RS e-트론 GT를 오래, 멀리 타면서 가장 많이 중얼거린 말이다. 그동안 수많은 고성능 자동차를 시승해봤다. 시종일관 솜털 쭈뼛 세우는 짜릿함을 선사한 자동차도 있었다. 운전석에 있는 것만으로 괜히 우쭐해지는 자동차도 있었다. RS e-트론 GT는 그런 모델과는 완전히 다른 고성능 자동차다. 전기 파워트레인을 품은 그랜드 투어러로서, 전에 느껴보지 못한 고성능의 결을 선사한다. 편한데 강력하고, 정숙한데 폭발적인 독특한 고성능. 이것 참, 하는 감탄사가 대변하는 다른 질감의 고성능이다. 새 시대의 새로운 고성능을 제시한다. 그것만으로 RS e-트론 GT를 소유할 가치는 충분하다.자동차 칼럼니스트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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